[관객모독] 연극열전 세번째
2004.3.5
동숭아트센터 소극장에서 <관객모독>(페터 한트케 작, 기국서 연출, 2004.3.4-4.11)을 관극하다. 같이 갈 사람이 없어 혼자 갔다. 혼자 보는 연극은 좀 쓸쓸한 감이 있지만 늦게가도 언제든지 좋은 자리가 남아있다.
<한씨연대기>를 시작으로 출발한 '연극열전'이 세 번째 배를 띄웠다. 극단 76단의 <관객모독>. 앞서간 연극 <한씨연대기>와 <에쿠우스>가 만선을 해서 부담스러웠을 것이지만 <관객모독>은 세 연극 중 가장 뛰어나고 가장 재미있다.
<관객모독>은 어두운 가운데 욕설로 시작한다. 그것은 관객에게 던지는 것이다. 불이 켜지면 무대엔 의자 네 개와 네 배우만이 있다. 그리고 불은 환하게 켜놓은 상태이다. 무대와 관객을 구분하지 않는다. 네 배우는 연극을 보러 온 관객들이 했을 법한 시시콜콜한 행동들을 조목조목 얘기한다. 극은 시작되지 않은 듯이 보이지만 이미 시작하기도 한 것이다. 연극은 틀에 박힌 배우와 관객의 경계를 허물고 끊임없이 정통 연극을 해체시킨다. 그 때문에 90분간 관객은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욕으로 시작해서 욕으로 맺는 이 연극은 판에 박힌 연극 언어를 비판한다. 그래서 언어의 다중적인 의미와 언어 유희로 관객들을 교란시키고 즐겁게 한다. 띄어쓰기를 무시한 끝말잇기식 릴레이 대사, 외국어, 수화, 랩 등 다양한 언어의 모험을 통해 일방적인 연극 언어를 비틀고 해체한다. 극중극이 삽입된 중후반부는 이 연극의 최고의 하이라이트이다. 여기서는 언어와 행동이 따로 노는 가운데 조화를 이루는 재미난 모습을 보여준다. 예전과는 달라진 젊은 관객들을 위한 연극적 실험이고 즐거운 장난이다.
<관객모독>은 끊임없이 관객들을 긴장케 하고 때론 불편케 한다. 관객을 극 속에 끌어들이기도 하고 욕을 하기도 하며 나중엔 소독액을 분사하기도 하고 물을 뿌리기도 한다. (관객 중에 지적인 관객이거나 이미 이 연극을 알고 있는 사람이 끼여있다면 보다 재미나게 극을 즐길 수 있다. 이 연극에서 관객은 능동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오늘 관람 시에는 우산을 들고 온 관객이 있었다. 물을 뿌릴 것을 예상한 것이다. 그는 연극이 끝나고 나서, 단단히 준비했는데 좀 약한 것 같다고 했다. 실제로 1978년 공연 당시에는 화장실에서 물을 퍼다 객석에 뿌려 이에 화난 관객이 의자를 던져 유리창과 조명이 박살나기도 했단다. 이는 해프닝이 아닌 본 연극이 의도한 것에 대한 효과적인 반응이다. 오늘 연극에서도 좀 더 관객 모독적인 행위를 했어도 좋았을 것이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 관객과 배우들은 매우 즐겁게 논다. 닫힌 마음을 갖고 공연장을 찾은 관객들은 어느새 마음을 활짝 열고 극에 참여하는 관객이 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은 무엇보다 네 배우들이 신나게 놀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영화계에서 맹활약중인 기주봉(그는 이 연극의 연출자인 기국서의 동생으로서 본 연극 초연 멤버다.)을 비롯해, 연극계의 베테랑들인 정재진, 주진모 그리고 매우 지적이고 연기 잘하는 홍일점 고수민은 앙상블을 이루며 물 만난 물고기처럼 관객을 완전 장악한다.
지적이고 유니크하고 실험적인 이러한 연극이 훌륭한 배우들과 함께 대학로 무대에 올려졌다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연극계를 위해서 연극열전은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한다. [★★★★☆]
※덧붙이기
원작자 페터 한트케는 빔 벤더스 감독과 함께 <베를린 천사의 시>의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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