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3일
광화문 스폰지하우스에서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이하 <해원>)을 보다.
뜬눈으로 밤을 보내던 요즘이었다. 여자 문제다. 속았었는데 또 속았다는 생각 때문에 하루 하루가 힘이 들었다. 3년 전, 처음 배신을 당했을 때 <옥희의 영화>가 답을 주었던 경험이 있다. 오늘 역시 <해원>이 큰 힘을 주었다. 그러고 보니 두 영화 모두 광화문 스폰지하우스에서 보았는데, 누군가 내 하루를 촬영했다면 마치 반복과 모방이 있는 홍상수 영화와 같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해원>에서 가장 큰 해답은 해원의 엄마(김자옥) 대사, "산다는 건,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하루하루 하고 싶은 대로 다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최근 사직서를 제출했다가 반려되어 늘 가지고 다니는 나의 사실이 극중 이선균의 사직서와 겹쳐졌을 때, 나는 다시 한 번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겠다고 다짐을 했다. 또 이틀 전, 새로운 인생을 위해 서촌을 찾았는데, 오늘 영화에서 서촌을 만나니 이 또한 운명이요, 계시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 <해원>은 홍상수 영화 중 가장 슬펐다. 무엇보다 극중 김자옥, 정은채-이선균, 예지원-유준상, 김의성 등 모든 인물이 결혼의 실패 혹은 외도(불륜)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기주봉 역시 결혼에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지나친 이입이 컸겠지만 영화가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잘못된 짝짓기로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이 정말 안쓰러웠다.
영화를 보고 나서 홍상수 영화의 인물들이 산책가이듯, 걸어서 광화문에서 사직동으로 이동, 영화 촬영소 탐방을 했다. 사직공원은 고교시절 같은 반 친구들과 놀러갔던, 눈물나게 아름다운 사진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라 금방 찾을 수 있었다.(영화 초반, 내가 기억하는 나무와 벤치가 그대로 남아있어 눈물이 났다. 그 시절, 풋풋한 사랑과 우정 때문이었나? 이 글과 사진을 혹시라도 볼지 모를 결혼해서 잘 살고 있을 친구들이여, 초상권 용서해주게나) 사직공원 바로 위에는 정말 종로도서관이 있었다. 그리고 내리막길에서 '사직동, 그 가게'를 참 쉽게도 발견했다. 정말로 가게 밖에서 헌책을 팔고 있었고(<은하철도의 밤>도 있었다는 걸 나중에, 찍어 온 사진에서 발견하고는 사오지 않은 걸 후회했다.) 정은채와 김의성이 마주 않은 자리도 그대로 있었다. 혼자 온 손님들이 대부분이어서 안심했는데 바로 커플이 와서 4인용 테이블을 혼자 쓰고 있던 나는 합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중 여자분이 과장을 조금 해서 정은채를 닮았었다. 혼자 와서 합석하게 된 거라면 김의성처럼 용기를 내어 차를 같이 마시는 건데, 결국 난 혼자서 야채커리를 먹었다.
그래도 괜찮다. 배화여대를 졸업한 아는 동생에게 '사직동, 그 가게'를 아느냐고 카톡으로 물었고 우린 조만간 만나기로 했으니까. [★★★☆]
※덧붙이기
1. 이선균은 괜히 싫은 배우 중 하나였는데 홍상수 영화에서 꾸준히 만나면서 호감으로 바뀌었다. 정은채는 참 예뻤다. 홍상수 여배우 중 개인적으로 미모 1순위로 생각한다. 캐릭터도 잘 입은 거 같다. 아쉬움이라면 몇몇 연기는 정유미였더라면 하는 생각. 그래도 어디서 이런 배우를 찾았을까 하는 감탄이 먼저다. 정은채는 이번 영화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는데 다음 영화도 기대된다.
2. 영화가 시작되고 샤를로뜨 갱스부르의 엄마 제인 버킨이 등장한다. '다정'이라고 쓰여 있는 한정식집 앞에서 정은채에게 길을 묻는데, 이 음식점은 <북촌방향>에서 주요 장소로 나왔던 그곳이다. 물론, 해원 모녀가 식사를 하는 장소도 이곳이다.
3. 정은채의 대사에서도 나오지만 요즘 북촌은 사람이 너무 많다. 그래서 나도 요즘 서촌으로 산책중이다.
<해원> 촬영지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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