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2.2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나에게 불의 전차를(Bring me my chariot of fire, 2013)>(이하 <불의 전차>)을 보다.
지난 해 12월, <오페라의 유령> 내한공연 예매하러 예스24에 갔다가 더 대박인 공연이 티켓 오픈한 사실을 확인하고, 신용카드에 손을 댔다. 다행히 조기예매로 30%를 할인 받아 무대 가까운 R석 자리를 56,000원에 구할 수 있었다. 당시, 회사 동료에게 이 일급정보를 전했으나 무반응. 그 여자 나중에 전석 매진된 사실을 알고는 곡을 했다.
내가 <불의 전차>를 기어코 보려했던 이유는 극작가와 배우들에 대한 믿음과 호기심 때문이다. "정의신>히로스에 료코>카가와 테루유키>김응수>차승원>쿠사나기 츠요시"가 단번에 공연 예매를 하게 했는데 먼저, 극작가 정의신은 영화 <피와 뼈>(2004)로 결코 잊을 수 없는 뜨거움을 주었기에 언젠가 그의 공연을 꼭 한 번 보고 싶었다. 히로스에 료코는 서로 더 늙기 전에 그냥 얼굴이 보고 싶었다. 카가와 테루유키는 내가 가장 믿고 보는 일본 연기파 남자배우다. 김응수 또한 연기 둘째가라하면 서러울 배우. 그리고 차승원과 쿠사나기 츠요시는 그냥 호기심 정도였다.
오전에 모델출사, 오후에 서울아트시네마 영화관람을 거친 후 남산 공연장을 서둘러 걸어 오른 터라 이미 저질 체력이 되어 있었지만 3시간 30분에 달하는 공연은 전혀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전체의 내용이 어렵지 않고 비극과 희극을 잘 버무린 터라 즐거웠다. 또 이보다 좋을 수 없는 캐스팅의 힘이 극을 끝까지 따라가게 만들었다.
특히 나는 기대하지 않았던 히로스에 료코의 연기에 홀딱 빠지고 말았다. 귀여움은 서비스였으며 무엇보다 정극에 아주 능했다. 쿠사나기 츠요시는 원래 한국말 잘 하는 건 알았지만 극 전체 대부분을 한국어로 하며 잘 소화해 냈다. 카가와 테루유키 역시 의외로 한국어 대사가 많았는데 연기에 전혀 지장 없이 카리스마를 폭발시켰다. 차승원은 "배우는 배우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몸소 보여주었다. 극중 '줄타기', 쉬운 일이 아닌데 실수 없이 해냈다. 이번 공연은 이처럼 혼신의 노력에 박수를 더 쳐주게 되는 것 같다.
물론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다. 큰 공연장에서 하는 연극이다 보니 집중하는 재미가 덜했다. 공연은 배우의 땀을 직접 보는 소극장 공연이 아무래도 제 맛인데 화려한 뮤지컬이나 콘서트도 아니고, 정극이다 보니 아무래도 감동이 새어나간 면이 없지 않다. 그리고 나처럼 일본어를 잘 모르는 사람은 좌, 우측 모니터로 안내하는 자막 보느라 더 집중하기 힘들었다.(내 주변 관객들은 일본어가 수준급인지, 아님 일본인인지 단 한 명도 한글자막을 보지 않았다.) 또, 앞사람 머리 잘라 버리고 싶은 좌석의 비정상도 신경 쓰이는 부분이었다.(참고로 난 허리가 상대적으로 길어 뒷사람에 대한 배려로 허리를 접고 있어야만 했다.)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공연장은 대체 몇 개나 있는지.
앞으로도 연기가 더 주가 되는 정극을 만나고 싶다. 정극이 더 올려지기 위해선 아무래도 이번 차승원의 경우처럼 유명배우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어야 한다. 깜짝 출연이 아닌 주·조역을 맡아 계속 배우고, 거듭나야 한다. 아무래도 돈이 문제인 거 같은데, 아예 국가가 나서, 출연료와 제작비를 보조해주면서 세 작품 영화에 출연하면 그 다음 한 번은 정극(연극)에 출연해야 한다는 식의 법을 만드는 건 어떨까? [★★★★]
※덧붙이기
1. 원래 연극(뮤지컬)에서는 무선마이크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맞다. 연기자는 무대의 크기에 맞게 자기 성량을 조절한 연기를 해야 한다. 그런데 가끔 준비도 안된 연기자들이 소극장임에도 무분별하게 마이크를 사용하는 것을 본다. 그런 공연은 짜증나서 바로 나가버리고 싶어진다. 오늘 <불의 전차> 배우들은 당연히, 3층 객석까지 있는 큰 공연장에서 기본대로 해냈다.
2. 공연 후 무대인사 때 기립박수가 쏟아졌는데 이 때 보았던 히로스에 료코의 눈물을 연신 훔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3. 19시 30분에 시작한 공연은 23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자가용이 없는 사람들 집에 잘 들어갔을까? 난 가까스로 구파발행 막차를 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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