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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일기

박광수 개인전 <영영 없으리>와 문성식 개인전 <아름다움. 기묘함. 더러움.>

by 22세기소녀 2020. 2. 27.

조금(鳥金, 인사동길 60), 조금솥밥

 

2020년 1월 7일 화요일

비가 내렸다. 올 겨울에는 눈 구경을 한 번도 하지 못했다. 안국역에서 이*하 작가를 만났다. ‘저 사람은 아니겠지’ 싶었는데 이*하 작가(이후 M)였다. M이 안내한 밥집 ‘조금(鳥金)’에서 조금솥밥을 먹었다. 밥이 나오기 전 M이 좋아해 소장하고 있는 피터 도이그(Peter Doig)와 전현선 작가의 작품집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빌려준다고 그 무거운 걸 들고 왔다. 테스트 촬영 목적으로 가져온 장비 중 액션캠으로 대화를 일부 기록했다. 밥을 맛있게 먹고, 계약을 간단히 마치고, 학고재로 향했다.

 

● 학고재를 제일 먼저 간 이유는 종료가 얼마 남지 않은 박광수 개인전 ‘영영 없으리(Nevermore)’(2019.12.11–2020.01.12)를 보기 위해서다. 지난 달 ‘칸쑈네: 타고난 버라이어티’ 전에서 제일 좋았던 박광수 작가의 개인전이 마침 열리고 있음을 알고서는 반드시 보러 가겠다고 마음먹었었다.

탈영역우정국에서 봤던 <숲에서 사라진> 보다 더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작품이 많이 보였다. 이전에 본 작품이 검정 잉크 펜을 사용해 가는 선으로 장면화환 드로잉이라면 이번 작품은 검은 아크릴로 더 경계가 흐릿해진 불가해한 숲을 표현했다. 굵기, 명도, 번짐, 움직임이 다른 선에는 다양한 시간이 담겨 있어 의식의 흐름도 함께 보는 듯하다. 복잡하고 추상적인 화면을 가만히 응시하다보면 형상이 보인다. 작가가 즐겨 표현하는 인물과 부엉이 그리고 무언가 또 숨겨져 있다. 오래 두고 보면 수수께끼들이 풀릴 것만 같다.

붓의 흔적을 더 뚜렷하게 볼 수 있는 대형 회화(200호 4폭) 앞에선 탄성이 절로 나왔다. 완벽히 장악한 세계를 커다란 캔버스에 홀린 듯이 쏟아낸 그의 작업 풍경이 궁금했다. M에게 박광수 작가가 작업을 하는 데 있어 음악을 들으며 했을 거 같냐고 물었고 M은 좋은 답변과 함께 본인의 작품 기분에 영향을 끼치는 사운드(음악, 영화, 소설낭독)와 영상에 대해서도 들려주었다. [★★★★]

 

● 학고재를 나와 바로 뒤편에 있는 국제갤러리에 갔다. 국제갤러리에서는 문성식 개인전 ‘아름다움. 기묘함. 더러움.(Beautiful. Strange. Dirty.)’(2019.11.28~12.31. 연장 2020.1.19까지)이 열리고 있었다. 한예종 출신 작가라는 정보만 알고 갤러리에 들어갔다.

사로잡혔다. 사실 스마트폰으로 접했을 땐 예쁘게 그려진 동양화가 아닌가 싶었는데 역시 작품은 직접 봐야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었다. 웬만한 자신감이 아니라면 ‘아름다움. 기묘함. 더러움.’이라는 전시 타이틀을 내걸기 힘들다 생각하는데 이보다 적절할 수가 없다.

국제갤러리 2관의 '그저 그런 풍경' 연작은 박수근의 회화를 떠올리게 한다. 민화적 풍경. 하지만 마냥 정겨운 것만은 아닌 일상 묘사가 다르다. 기법적 새로움도 있다. 유화 바탕을 연필로 긁어 그린 것이라고 한다. 작품 천을 오려 떼어내 틀에 다시 붙여 전시한 작품도 눈에 띄었다. 액자와 사각 캔버스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고 있으면서도 상품성도 생각하는 또 다른 아이디어! 그리고 '그저 그런 풍경' 연작은 특이하게도 민트색 벽에 전시되어 있다. 나는 그것을 유심히 생각하지 않았는데 M의 설명을 통해 작품 설치에 대한 중요한 지점도 깨닫게 되었다.

‘그냥 삶’ 연작 또한 아름다움과 함께 파고드는 다양한 감정을 느껴볼 수 있다. 보통 예쁘다고 생각하는 꽃에 대한 다른 접근(가령 꽃이 성기라는 해석과 야릇하게 표현된 꽃). 그 꽃과 함께 구성되어 있는 나비와 거미(줄), 새 그리고 꽃을 꺾으려는 시체 같은 손.(나비와 나방을 한 폭에 그려 시간을 섞었다는 글을 나중에 봤다. 나비와 나방의 차이를 검색해 보니 ‘나비는 앉을 때 날개를 접고 주로 낮에 활동하지만, 나방은 앉을 때 날개를 펴고 주로 야행성’이라고 한다. 흥미로운 관찰이고 기묘한 공존이다.) 우리네 그냥 삶과 닮았다. 약육강식의 세계.

국제갤러리 3관에 있는 대형 회화(‘그냥 삶’)는 압도적이다. 꽃 그 자체로 참 아름다운데 이 또한 들여다보면 기묘함이 도사리고 있다. 이 작품은 검은 바탕에 젯소를 바른 후 긁어낸 선(M의 생각을 갤러리에서 담은 영상이 있는데 집에서 다시보기를 통해 문성식 작가의 작품 제작 과정을 엿볼 수 있었다. 역시 현재진행형 동료의 눈은 다르다. M의 설명이 없었다면 그냥 신기하다고만 생각했을 작품. 끔찍한 일)과 채색(구아슈. 물과 고무를 섞어 만든 불투명한 수채 물감)을 했다. 스크래치 기법이 작가들에겐 새로운 것이 아닐 수 있지만 갤러리 투어를 이제 본격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입문자에겐 정말 신선했다. 그리고 그 기법이 작품 주제와 조응하여 더 큰 감흥을 주었다. 그러고 보니 M의 작품에서도 평면 회화의 상식을 깨는 기법적 새로움이 있었다. 웹에서 본 ‘곱게 자란 아이’는 소녀와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분위기가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다. 직접 작품을 보니 캔버스 천에 드러난 울퉁불퉁함과 사포질(설명을 들어 알게 됨)을 볼 수가 있었고 그 질감은 더 많은 감정을 들게 한다. M이 감상 팁을 하나 주었는데 그림을 볼 때 작품 모서리를 보면 과정을 추적해 볼 수 있으며 그 자체의 아름다움도 느껴진다고 한다.

문성식 작가의 황홀한 드로잉 연작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구아슈, 2019)

 

드로잉 연작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는 사랑을 나누는 남녀의 신체를 묘사한다. 아름답지만 또 누군가에겐 그렇지 않을 뒤엉킴.

뒤늦게 문성식 작가에 대한 이런 수식들을 봤다. “미술계의 아이돌”, “고소영 인증샷”, “2011년 개인전 완판", "이번 전시작 110개 중 90% 판매", "전시 연장”. 모두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내겐 그러한 수식보다 회화가 단순히 채색이 아닌 다양한 실험이 가능한 세계임을 깨닫게 해준 점이 고맙게 느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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